요가/요가 아사나

질병은 많으나 처방은 하나다

IceBass 2007. 12. 20. 13:15

-오쇼-
 
그대는 화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도 하고 결심도 하지만 매번 허사로 돌아간다.

욕심을 부리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하지만 매번 같은 덫에 걸려든다.

자신을 바꿔보려고 온갖 시도를 다해보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 간단한 열쇠가 있다. 각성이 그것이다.”

아마 그대는 나의 처방을 믿지 못할 것이다.

모든 걸 다해보았는데도 안 되는데, 어떻게 각성만으로 나를 변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러나 열쇠는 항상 작은 법이다.

커다란 열쇠를 보았는가? 작은 열쇠가 커다란 자물쇠를 여는 법이다.

사람들은 붓다에게 이렇게 묻곤 했다.

“어떻게 하면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욕심을 내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음식이나 성욕을 집착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질문에 붓다는 항상 같은 대답을 했다.
“깨어 있으라! 그대의 삶에 깨어 있으라!”
붓다의 제자인 아난다는 수많은 질문에 한결같이 같은 처방을 내리는 붓다의 대답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아난다가 붓다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은 욕심에 대해 묻고 어떤 사람은 성욕에 대해 묻고 또 어떤 사람은 음식에

대해 묻습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왜 같은 처방을 내리시나요?”
그러자 붓다가 대답했다.
“그들이 꾸는 꿈이 각기 다른 것처럼 그들이 앓고 있는 병 또한 각기 다르다.”

1천 명의 사람들이 잠들어 있으면 1천 명의 사람들은 각기 다른 꿈을 꾼다.

그대가 나를 찾아와

 “어떻게 하면 꿈꾸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나도 항상 같은 처방을 내릴 것이다.

“깨어나라!”  처방은 달라질 수 없다. 항상 똑같다.

그것을 각성이라 불러도 좋고

관조라 불러도 좋고

기억이라 불러도 좋으며

명상이라 불러도 좋다.

이름만 다를 뿐,

처방은 하나다.
 
분석과 관조
 
서양에서는 문제를 이렇게 해결한다.

먼저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며

문제가 일어난 근원으로 거슬러올라가

문제의 뿌리를 뽑는 것이다.

마음의 조건화를 풀어내거나 마음을 재조건화시키거나

정신에 각인된 것을 뽑아냄으로써 문제를 제거하려는 방법,

이것이 서양적인 접근방식이다.

정신분석은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는 방법이다.

이런 방법이 상당한 효과를 거두는 것 또한 사실이다.

정신분석에서는 어린시절이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문제가 맨 처음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가 문제의 원인을 찾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몇 십 년 전의 어린시절로 되돌아가,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겼음을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에게는 문제가 무수히 많기 때문에 한 문제의 해결로는 어림도 없다.

물론 정신을 분석한다면 한 문제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원인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그 문제를 제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무수한 문제들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렇게 한 문제를 파고들어 원인을 발견하고 문제를 제거하는 식으로 한다면

무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 생(生)을 가지고도 모자랄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겠다.

정신을 분석해서 한 생의 문제들을 모두 해결하려면 수없이 많은 생이 필요할 것이다. 이는 참으로 비효율적인 일이다.

사실 이렇게 할 수도 없다.

설사 여러 생에 걸쳐 한 생의 문제를 해결한다 해도,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동안

또 수없이 많은 문제들이 생겨날 것이다.

이렇게 하다가는 문제의 산더미에 파묻히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분석은 불합리한 것이다!

요즈음 사람들은 정신분석학적 방법을 몸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롤핑요법이나

생체에너지학 등에서는 몸이나 근육조직에 각인된 것들을 제거하려고 한다.

이런 기법들에서는 몸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몸의 역사를 다루든 마음의 역사를 다루든 둘 다 인간의 과거를 다룬다는 점에서 같다.

인간의 마음은 항상 두 가지 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한다.

하나는 과거를 개혁하려는 일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일이기 때문에 고치거나 변화시킬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우리는 실재의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다.

우리가 과거로 돌아간다고 할 때 이는 과거의 기억 속으로 간다는 뜻이다.

그것은 진짜 과거가 아니다.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과거는 변화시킬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이는 인간의 불가능한 목표이다.

이 불가능한 목표 때문에 인간은 참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다.

인간은 지나간 과거를 없었던 일로 되돌리고자 한다.

이미 일어난 일을 어떻게 없었던 일로 되돌릴 수 있는가?

과거란 변화의 가능성이 이미 종결되었음을 뜻한다. 또한 과거는 이미 벌어진 일이다.

따라서 이제 와서 과거를 변화시키거나 바꾸거나 원상태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인간의 불가능한 생각은 미래를 확실한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이다.

이것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미래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오지 않은 것을 확실한 것으로 만든단 말인가?

미래란 불확실한 것이다. 활짝 열려 있는 것이다.


미래는 순수한 가능성이다. 어떤 것도 확실하게 할 수 없다.

과거는 순수한 실제(實際)이다. 과거는 이미 일어난 일이다.

과거 일은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다. 인간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 서서 늘 불가능한 일을 생각한다.

인간은 내일의 일을 확실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이 말을 가슴 깊이 새겨두라.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미래를 확실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을 낭비하지 말라.

미래는 불확실성이다. 즉 불확실성이 미래의 속성인 것이다.

또한 뒤를 돌아보는 데도 시간을 헛되이 쓰지 말라.

과거는 이미 지나간 일이다. 죽어버린 현상이다. 과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기껏 과거를 다시 해석하는 일밖에는 없다.

과거의 재해석, 그것이 바로 정신분석가들이 하는 일이다. 아무리 재해석을 한다 해도 이미 지나간 과거는 바꿀 수 없다.

정신분석과 점성술……

점성술은 오지 않은 미래를 확실하게 만들려는 노력이요

정신분석은 이미 지나간 과거를 돌이키려는 노력이다.

둘 다 과학이 아니다.

둘 다 불가능한 일을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좇는다.

왜냐?

인간이 바로 그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미래를 확실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래서 점성술사를 찾아가고 타로 리더를 찾아간다.

자신을 속이고 기만하는 길은 수없이 많다!

세상에는 심지어 과거를 바꿀 수 있다고 속이는 자들이 있다.

과거를 바꾸려는 생각과 미래를 확실하게 만들려는 마음을 버려라.

그러면 인간의 모든 어리석음에서 해방될 수 있다.

어리석음에서 해방된 사람은 정신분석가를 찾을 필요도 없고 점성술사에 의지할 필요도 없다. 그는 과거가 이미 지나갔음을 안다.

미래가 아직 오지 않았음을 안다.

그는 일어나는 대로 지켜본다.

지금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인간은 미래를 확실한 것으로 만들려 함으로써 지금 이 순간을 허비한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진짜로 존재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서양은 항상 문제를 들여다보며 어떻게 하면 문제를 풀 수 있을까 궁리한다.

서양은 문제를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특정 전제하에 특정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그 논리가 완벽하게 보이는 법이다.

이런 일화를 읽은 적이 있다.
위대한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사람이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그가 심오한 수학문제에 대해 사색하고 있는데 갑자기 기장의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승객 여러분, 죄송합니다. 도착이 약간 지연될 예정입니다. 1번 엔진이 멈췄습니다.

 그래서 현재 나머지 세 개의 엔진으로 비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약 10분 후에 다시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승객 여러분, 죄송합니다. 도착이 조금 더 지연될 예정입니다. 2번과 3번 엔진이 멈췄습니다. 현재 하나 남은 4번 엔진으로 비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자 철학자는 옆 사람을 보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런! 나머지 하나마저 멈추면 밤새도록 여기 공중에 떠 있어야 하겠군요!”
 
하나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불합리한 것도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특정 전제를 받아들이면 완전히 그릇된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그 길이 맞다고 굳게 믿는다. 인간의 마음과 정신분석에 대한 방대한 양의 문헌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이란 논리의 길을 열어놓자 20세기는 그 논리에 완전히 지배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본다.

첫째 동양에서는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순간, 문제의 99퍼센트가 사라진다. 그리고 문제에 대한 시각이 완전히 변한다.

둘째 동양에서는 “인간이 문제와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문제가 존재한다”고 본다.

사실 문제는 과거나 역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문제와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문제는 발생하는 것이다.

문제와의 동일시, 이것이 진짜 문제다.

따라서 문제를 푸는 열쇠는 동일시를 끊는 데 있다.

예를 들어,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정신분석가에게 가면 정신분석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화가 어떻게 나기 시작했는지 과거로 돌아가봅시다. 어떤 상황 하에서 마음속에 각인되고 조건화되었는지 봅시다. 마음속에 각인된 것은 모두 지우고 깨끗하게 정화해야 합니다. 당신의 과거를 깨끗하게 만들겠습니다.”
동양의 신 비가를 찾아가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자신과 화를 동일시하면서 ‘내가 곧 화’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다음번에 화가 나거들랑 지켜보십시오. 관조하십시오.

  자신과 화를 동일시하지 마십시오.

   ‘나는 화다’, 혹은 ‘나는 화가 났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텔레비전을 보는 것처럼

   그냥 화가 나는 것을 지켜보십시오. 마치 자신이 삼자인 것처럼 지켜보십시오.”

그대는 순수의식이다. 그대 주위에 분노의 구름이 내려오면 그냥 지켜보라.

분노와 동일시하지 않도록 깨어 있으라. 문제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으면 된다.

일단 동일시하지 않고 지켜보는 법을 터득하게 되면 수많은 문제를 일일이 해결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사라진다. 하나의 열쇠가 모든 자물쇠를 연다.

분노와 욕심, 성욕 등의 문을 연다. 마음이 지어낸 문제의 문들을 모두 연다.

동양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동일시하지 말라.”

구제프의 ‘자아기억’도 바로 이런 것이다. 이를 명심하라. 그대는 관조자임을 기억하라.

좀더 의식을 각성하라.

붓다의 말은 바로 그것이다.

마음의 하늘에 구름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라.

구름은 과거에서 온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지듯 난데없이 오지 않는다.

구름은 사건의 연장선에서 나타난다. 어떤 식으로 구름이 오든 신경쓰지 말라.

지금 바로 이 순간 그대는 구름으로부터 초연할 수 있다.

자신과 구름 사이의 끈을 잘라버릴 수 있다. 오직 이 순간에 잘라버릴 수 있다.

과거로 돌아가서는 일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30년 전 어느 날 화가 났다고 하자. 그날 그 순간 그대는 화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그렇다고 지금 그때 났던 '화'와의 동일시를 끊을 수 없다.

그때 났던 화는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 떠오르는 분노와의 동일시를 끊을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분노와의 동일시를 끊으면 과거에서 오는 분노와의 동일시가 떨어져나간다. 과거로 돌아갈 필요 없다. 과거로 돌아가 부모나 사회, 사제나 교회가 그대에게 한 일들을 원상으로 돌이킬 필요 없다. 과거로 돌아가는 일은 순전히 시간낭비일 뿐이다. 현재라는 참으로 귀중한 시간의 낭비일 뿐이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은 그대의 인생을 충분히 망쳤다. 그리고 이제 또 과거로 돌아가서 과거의 일을 해결하려고 들면 지금 이 순간을 놓치게 된다.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지켜보기만 하면 뱀이 낡은 허물을 벗듯이 문제에서 바로 빠져나올 수 있다.

이전에 형성된 조건화와 과거는 존재하나, 몸과 마음에 존재할 뿐이다. 그대의 의식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은 조건화될 수 없는 것이다.

의식은 언제나 자유롭다. 자유가 의식의 속성이자 본성이다.

오랜 기간의 교육과 그로 인한 억압을 우리는 꿰뚫어볼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그러한 교육과 억압을 꿰뚫어보면 의식은 그들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식은 교육이나 억압과 떨어져 있으며 깨어 있기 때문이다.

의식마저도 억압될 수 있다면 누가 깨어서 지켜본단 말인가?

그대의 의식, 그대의 참나마저 억압될 수 있다면 깨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그대가 “나는 미친 교육제도 때문에 21년을 낭비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적어도 그대는 미친 사람이 아니다. 교육제도는 그를 제도권으로 끌어들이는 데 실패한 것이다.

교육제도가 미쳤다고 볼 수 있는 사람은 이미 미친 사람이 아니다.

미친 사람은 자신이 미쳐 있음을 보지 못한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만이 교육제도의 광기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정신이상을 정신이상으로 볼 수 있기 위해선 온전한 정신이 필요하다. 21년 동안 그대를 억압한 교육제도는

실패했다. 교육제도는 교육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에게만 성공할 수 있을 뿐이다.

한발만 뒤로 물러나 교육제도를 보면 그대의 정신은 깨어날 수 있다.

이것이 의식의 아름다움이다. 의식은 그 어떠한 것에서도 빠져나올 수 있다. 의식에게는 장벽도 경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가 영국인이라고 하자. 국적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국적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러면 그대는 이제 더 이상 영국인이 아니다.

그대의 하얀 피부가 변한다는 말이 아니다. 피부는 그대로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대는 백인과 더 이상 동일시하지 않으며 백인의 눈으로 흑인을 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차별의 어리석음을 본다. 그대가 더 이상 영국인이 아니다고 해서 모국어마저 잊어버린다는 말은 아니다. 모국어는 변함없이 그대의 기억 속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대의 의식은 영국인이라는 틀에서 빠져나온다. 그대의 의식은 산 위에서 저 밑 계곡에 죽어 있는 영국인을 지켜본다.

동양의 방법론은 ‘관조’라는 한마디로, 서양의 방법론은 ‘분석’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분석은 끊임없이 돌고 돈다. 관조는 돌고 도는 원에서 빠져나온다.

분석은 하나의 악순환이다.

진짜 분석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사람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과거로 들어간다고 할 때 그 끝은 어디인가? 어디가 정확히 끝인가? 과거 속으로 들어간다 할 때 성애(性愛)는 어디서 출발하는가? 사춘기가 시작되는 14살인가? 그렇다면 14살에 난데없이 나타났는가? 성애는 14살 이전에도 몸속에 잠재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태어날 때 시작되었는가? 아니면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을 때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영혼이 자궁 속으로 들어왔을 때인가? 아니면 그 이전인가?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더듬어 올라가면 대체 어디에서 끝나는가? 어쩌면 아담과 이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그것도 아니다. 아담과 이브를 창조한 하나님 아버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분석은 항상 반쪽짜리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분석은 어느 누구에게도 진정한 도움을 줄 수 없다. 그냥 현실에 안주하도록 만들 뿐이다. 분석을 통하면 문제와 그 근원, 뿌리 등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런 지적인 이해로는 사회에 좀더 잘 적응할 수 있을 뿐이다. 자신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다는 말이다. 분석을 통해서는 변형도, 변화도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관조는 혁명이다. 뿌리로부터의 근본적인 개혁이다. 완전히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관조를 통해 의식이 조건화에서 깨어나기 때문이다. 조건화는 몸과 마음에 박혀 있다. 하지만 의식은 조건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의식은 순수하다. 언제나 순수하다. 의식은 순결하다. 그 어느 것도 의식의 순결을 범할 수 없다.
동양의 접근방식은 명상가로 하여금 깨어나 순결한 의식을 보게 하는 것이다. 동양은 하늘을 바라보는 반면, 서양은 구름을 바라본다. 구름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구름은 바다에서 발생한다. 따가운 햇살을 받은 바닷물이 증발하여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된다.

하늘의 구름은 비가 되어 대지를 적시고 나무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하여 강물이 되고 강물은 다시 바다로 흘러들어가 햇빛을 받고 증발하여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땅으로 떨어진다. 이렇게 하나의 원 속에서 끊임없이 돌고 돈다. 대체 원의 어느 곳에서 빠져나온단 말인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쉼없이 돌고 도는데.

하늘도 구름처럼 발생의 시점이 없다. 하늘은 외부 인자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다. 세상 만물이 존재하려면 하늘이 필요하다. 하늘은 세상이 태어난 바탕이다.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하늘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만약 하늘이 없었다면 하나님은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하나님은 공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만약 공간이 없었다면 어디에다가 세상을 창조한단 말인가?  창조한 세상을 어디에 놓는단 말인가? 먼저 공간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위해서도 공간이 있어야 한다. 내 말을 반박하기 위해 “하나님은 공간도 창조하셨다”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 말은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과연 하나님이 공간도 창조하셨다면 그전에는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하늘은 항상 거기에 있다. 이 하늘을 알아차리는 것이 동양의 길이다.

이와 반면에 서양의 길에서는 구름을 알아차림으로써 약간의 도움을 받는다.

하지만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중심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주변부에 대해 좀더 깨어 있게 되지만 중심을 자각하지 못한다.

태풍의 눈을 찾아야 한다.

이 일은 오직 관조로써만 가능하다. 관조는 조건화된 것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근육조직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관조는 근육조직과 조건화 너머에 존재하는 참나를

체험한다. 초월과 피안의 경지에는 어떤 문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관조하면 모든 것은 그대의 손안에 들어온다.

몸에는 근육조직이,

마음에는 조건화가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제 주인은 그대다.

문제를 원할 때는 문제가 박혀 있는 심신 속으로 들어가 누리면 된다.

문제를 원하지 않을 때는 문제가 박혀 있는 심신 밖으로 나오면 된다.

여전히 문제는 심신에 각인된 상태로 남아 있겠지만 그대는 문제에 초연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