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워 하는데도
한 번은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꼬와 나는 세 번을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인연(피천득, 1910 ~ 2007)
한라산[漢拏山 : 1950 m]
(2004.06.26.)
여행경로 : 동인천역 ~ (택시) ~ 인천연안부두여객터미널 ~ (오하마나) ~ 제주항 ~
성판악 ~ 백록담 ~ 관음사 ~ 제주항 ~ (오하마나) ~ 인천여객터미널 ~
동인천역
산행코스 : 성판악(750 m) 휴게소 ~ 사라대피소 ~ 진달래대피소 ~ 백록담 동능 ~
관음사 주차장(620 m)
(약 7시간, 약 18 km)
여행월일 : 2004.06.25.(금) ~ 2004.06.27.(일) (2박 3일)
동행인원 : 7명(유피트래킹, 야호산악회)
여행지역 : 제주도(한라산國立公園)
호남선 완행열차, 그 젊은날의 추억
2004 년 6 월의 한라산 산행후 근 3 년만에 다시 여기에 들려 그때의 산행사진을 본다. 여러번 한라산에 올랐지만, 나의 한라산 초등은 1975년 10 월 초순이다. 제주대에 다니는 고교 동창들도 만나보고 한라산 등반도 할 요량으로 집을 나와 용산역에서 완행열차를 탄게 벌써 32 년전 일이다.
일반 전화도 귀하던 때라, 집에 주소가 적힌 편지 봉투를 두고와 용두암 근처를 무작정 헤메던 일, 화장실에 갔다가 혀를 낼름 거리는 돼지들을 보고 기겁하던 일, 島民들이 쌀밥은 어찌하고 보리밥만 먹는지가 궁금했던 생각, 친구들이 강의를 받으러 가고 혼자서 빗속에 버스를 타고 제주도를 빙빙 돌던 일, 빗속의 서귀포 버스터미널에 남자 버스 차장들이 외치는 市에 간다는 소리를 알아 듣고 천장 낮은 마이크로 버스를 타고 제주시의 친구 자취방으로 돌아 오던 일, 漢水 以南에서 제일 높다는 KAL 호텔 19 층에서 일주일 여비의 반 가까이를 여행 첫날 친구와 맥주를 마셔버리던 일 등등이 제주 가는 오하마나호 선상에 누운 나의 머리에 스쳐 간다.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소녀의 목소리에 부시시 잠을 깬다. 내가 탄 호남선 완행열차는 용산역에서 어제밤(1975 년 10 월 5 일 일요일) 10 시에 출발하여 12 시간 만인 다음날 아침 8시경 목포역에 도착할 예정이다. 제주행 안성호는 오전 10 시경 목포항을 떠나 제주항에 오후 6 시경 도착할 예정이다. 월요일 아침 흔들리는 열차의 진동을 느끼며 고개를 드니 열차는 아침 햇살을 옆으로 끼고 나주평야의 한가운데 어딘가를 달리고 있었다. 막 정차하고 떠나는 역에서 교복을 입은 18 세 정도의 여학생이 친구와 같이 열차를 타고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중에 추측하여 보니 그곳은 지금은 없어진 고막원역이나 아니 몽탄역 부근일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소녀들은 목포로 통학하는 고등학생들 같았다. 그 소녀는 별처럼 반짝이는 투명하고 깊은 눈동자로 막 잠에서 깨어나는 나를 조금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 소녀는 나의 맞은 편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 소녀의 그 눈동자가 한참이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생경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 눈을 가진 그 소녀가 보고 싶은 밤이다. 누워 있어서 그런지 배의 흔들림이 조금은 느껴진다. 조금이라도 잠을 자야지, 그렇지만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내일 산에 오르려면 그래도 자야지 한다. 이제는 내 또래의 중년을 넘긴 여인이 되었겠지만 할 수 있다면 꼭 한번 보고 싶다. 지금도 그때의 그 아름다운 눈과 눈동자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오늘 2007 년 6 월 11 일 월요일 그때 제주의 두 친구 중 한 친구를 청진동의 목포집에서 만났다.
제주 ~ 추자 ~ 목포 항로의 안성호(1968) 모습
한라산은 여러가지 다른 이름이 있지만 그중 하나가 혈망봉(穴望峰)이란 이름이다. 한라산 혈망봉(穴望峰)에 대한 기록으로 지도에 표시된 것은 1861년 김정호(金正浩)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 나와 있으며, 금강산에도 있다. 금강산 혈망봉은 정상 암석에 관통된 구멍을 가리키며, 이 구멍을 통해 새파란 하늘이 내다보인다 해서 '혈망봉'이라 붙여졌다고 한다. 한라산 혈망봉에 대한 문헌기록은 1609 년 3 월에 등산한 김치(金緻)가 '산꼭대기에 도착하여, 혈망봉을 마주하여 앉았다. 봉우리에 하나의 구멍이 있어 가히 통하여 바라볼 수 있다.'고 하였고,1702 년 3 월에 등산한 이형상(李衡祥)은 '정상에 올라 혈망봉과 마주 앉았는데 산봉우리에는 구멍이 한개 있으며 운천(雲天)을 엿볼 수 있다.'고 하였다. 1875 년 2 월에 등산한 최익현(崔益鉉)은 '북쪽으로 정상 화구벽에 도착하여 가장 높은 곳인 서쪽 봉우리를 등정하고 백록담 가에 이르렀다. 북쪽으로 1 리(里)쯤 떨어진 곳에 이른바 혈망봉과 옛 사람의 각명(刻名)들이 있다고 하였지만 시간이 없어 가지 못하였다.'고 적고 있다. 김치와 이형상의 기록을 정리하면 혈망봉은 서쪽 정상 최고점 앞쪽에 있는 큰 구멍을 말하는 것이고, 최익현의 기록은 백록담의 규모를 알고 나서 해석해야 한다. 한라산 백록담 분화구는 대략 깊이 100 여m, 장반경(동-서) 600 m, 단반경(남-북) 400 m로, 단반경 남북의 거리는 지표면으로 계산하면 600 여m가 된다. 각명은 동릉정상 푯말에서 분화구쪽의 단단한 바위에 새겨져 있으며, 각명을 쓴 이는 조관빈, 심락수를 비롯하여 엄청 많이 있다. 북벽이나 서북벽 바위에는 각명이 없고, 서쪽 정상부근의 바위는 부석부석하여 각명을 새길리 없다. 정상 등반이 허용될 때 새긴 낙서들마저 판독이 어려울 만큼 훼손됐기 때문이다.
최익현 기록의 북쪽 1 리는 각명에서 남쪽 1리 라는 이야기로, 위치는 남벽 정상을 말한다. 여러 문헌을 보면 조선시대까지의 한라산 등반은 대부분 영실 존자암을 거쳐 남벽쪽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북쪽 1리 지점에 혈망봉이 있다는 이야기는 남벽정상에서 북쪽 1리 지점에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기록을 종합하면 혈망봉(穴望峰)은 분화구 중심점(백록담 남변)에서 100 여 m 높이의 직경 400 m 능선을 경계로 파란하늘을 바라보는 것으로, 분화구 전체를 말한다. 금강산의 혈망봉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장엄한 경관이다. 최익현의 기록에 "백록담 가에 이르렀다."고 함은 혈망봉에 있으면서 "시간이 없어 혈망봉을 찾지 못하였다."는 이야기와 상통한다. 한라산 백록담에서 관음사 등산코스를 따라 하산 하다보면 삼각봉 직전, 1.9 Km 지점에 '용진각'이라 부르는 곳이 나타난다. 한라산에서 산세가 가장 웅장한 곳이다. '용진각(龍鎭閣)'은 1957 년 9 월초 당시 경찰국장이 착안하여 지어진 산장이름으로 학술조사단이나 등산객들의 편의시설이었다. 위치는 지금은 헐린 용진각 원형대피소 북서쪽 약 30 m 지점인 큰 계곡과 작은 계곡사이에 지었었는데 아직도 산장을 지었던 흔적이 남아있고, 1962 년 여름까지 그 뼈대가 남아있었다.가옥형식으로 지어진 용진각 산장은 한라산의 기상을 고려하지 않고 지어서 1 년을 버티지 못했다. 바로 다음해 강풍으로 인해 문짝과 지붕 일부가 무너져 산장으로서의 구실을 못할 정도로 파손되었고, 부서진 산장은 보수하지 않고 방치하다보니 등산객들이 나무를 화목으로 사용해버려 산장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삼각봉(小鳶頭峰 : 소연두봉, 1695 m)
관음사 등산코스로 내려가다보면 용진각을 지나자마자 예리한 하늘을 찌를듯이 우뚝 서 있는 삼각봉이라
부르는 봉우리를 만난다. 옛날에는 이 봉우리를 '소연두봉(小鳶頭峰)'이라 불렀다.1937 년 한라산을 등산한 이은상의 기록을 보면 "개미목 머리에 올라서서 앞으로 바라보는 곳에 삼각형으로 우뚝 뾰족한 봉이 솟아 있으니 이것은 소연두봉(小鳶頭峰). 그 뒤로 좀 더 높고 뾰족한 큰 봉이 대연두봉(大鳶頭峰)이다."고 되어있다.
1960 년대까지 개미등에 나무가 거의 없고 조릿대만 무성했을 때는 등산로에서 두 연두봉을 한꺼번에 볼 수
있었지만 요즘은 무성한 소나무가 시야를 가려서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도 1 m 이상 눈이 쌓였을 때는
등산로에서 보이는 지점이 있다. 삼각봉을 조금 미치지 못한 곳에서 한라산 정상쪽으로 바라보면 오른쪽에 소연두봉, 중간에 대연두봉, 왼쪽에 왕관릉이 나란히 어깨동무하여 나타난다. 위치가 웬만한 체력을 가진 사람들은 소위 진을 다 뺀 지점이라 앞사람의 신발뒤꿈치나 엉덩이만 보면서 등산하는 지점이다. 그래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으면 잠깐 동안 스치고 지나가는 풍광이라 놓치기 쉽다. 그 다음 볼 수 있는 곳은 삼각봉 북쪽 200 여m 지점에서 등산로 동쪽으로 15 m 쯤 벗어나면 그 경관을 다시 볼 수 있다.
연두봉(鳶頭峰)을 해석하면 솔개의 머리와 같이 생긴 봉우리란 뜻으로, 그 형상을 보면 대연두봉은 솔개
머리의 정면 모양이고, 소연두봉은 솔개의 부리를 닮아 날카롭게 생겼다. 대연두봉은 솔개가 한라산 정상에
앉아 제주를 지켜주는 모습이고, 소연두봉은 맹금(猛禽)류의 부리가 하늘을 향해 뾰족하게 솟은 것이 하늘의 사악한 기운을 막아주는 모습으로 와 닿는다. 연두봉을 삼각봉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개미등코스로 등산하기 시작한 일제강점기 때부터로 여겨진다. 어쩌면 관음사코스의 매력은 연두봉의 위용과 용진각의 장엄함, 왕관릉의 당당함 때문이다.
한라산을 북쪽으로 등반할 수 있는 곳은 관음사 코스뿐이다. 그러나 80 년대 말까지만해도 관음사 동쪽으로 올라가서 토적악에 이어지는 코스와 능화오름을 거처 큰드레왓, 장구목, 서북벽으로 정상을 등반하는 능화오름 코스, 탐라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계곡소행 코스, 현 관음사 등산코스로 입산하여 등산하다가 탐라계곡 동쪽능선을 따라 왕관릉 동쪽으로 올라가서 왕관바위 상단에서 관음사코스와 만나 등산하는 동릉코스가 더 있었다. 물론 지금은 모두 다닐 수 없다.
조선시대 한라산을 북쪽으로 등반한 코스는 대부분 동릉을 이용하였고, 현재의 관음사코스는 일제시대부터 나타난다. 조선시대 한라산 등반은 최근기록인 1875 년 3 월에 등반한 최익현의 “서쪽으로 조금 가니 깎아지른 절벽이 수천 길이다. 삼한(三韓) 때 봉수(烽燧) 터가 있으나 가보지 않았다.”는 기록과 제주목사들이 북쪽으로 한라산을 등반할 때 가마를 타고 정상에 올랐다는 두 기록을 근거로 추정해보면 탐라계곡 동쪽능선을 따라가다가 왕관릉 능선을 동쪽으로 올라 정상으로 이어지는 동릉코스로 등산하였다.
왕관릉
일제시대 기록은 1920 년대 스님들의 등반기나 1937 년 등반한 노산 이은상의 등반기에 개미등으로 등반했다는 기록이 나오지만, 이때까지 왕관릉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특히 이은상은 용진각 부근에서 연두봉, 대연두봉, 막은다리, 안막은다리, 봉래천 등을 나열하면서도 왕관릉은 없다. 왕관릉은 1935년 등반한 일본인 대학생 이즈미세이찌의 기록을 보면 왕관바위, 왕관능선으로 표현하면서 나타난다. 왕관릉 모양이 우리나라 왕관 보다는 서양 왕관에 가까운 것으로 보아 일본인에 의해 붙여진 것이라 유추할 수 있다.
고지도에 보면 백록담을 기준으로 북쪽으로 구봉암, 입선, 연대 순으로 나타나고 오른쪽으로 탐라계곡을 건너 약간 하단에 두리서(드레왓)가 표시되어 있다. 즉 연대가 있었던 곳은 입선이고, 입선이 곧 왕관릉이다. 지도에 따라서는 '입선석(入先石)', '입선암(入先岩)'이라 표시된 것도 있다. 고지도와 현대지도를 들고 삼각봉앞 개미등 헬기장에서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다시 말해 한라산 정상에 오를 때에는 현재의 왕관릉을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올라가 왕관바위 상단 능선에서 만나 안막은다리(현재의 관음사코스 상단)를 따라 정상에 올랐다. 즉 한라산 정상을 들어서는 길목에 장승처럼 우뚝 서있는 바위를 '입선(入先)'이라 명명되었다는 이야기다.(daum.cafe 내사랑 한라산에서 가져온 글)
~ 한라산 등반 코스 ~
[성판악코스 : 동쪽 접근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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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동쪽 코스로 경사가 완만하다. 2003년 3월부터 정상 등반이 연중 가능하다. 등산로가 비교적 완만해 정상등산을 하는대부분 사람들이 즐겨 이용하는 등산길이다. 등산로에는 서어나무 등 활엽수가 우거져서 삼림욕하면서 걷기는 좋으나 주변 경관을 감상 할 수 없다. 등산로는 주로 돌길로 되어 있어서 등산화나 운동화를 신어야한다. 5.6km 지점에 사라악 약수터가 있으나 물은 준비하는 것이 좋다. 속밭까지는 등산로가 평탄한 편이고, 사라악부터 진달래까지는 경사가 있다. 해발 1800고지에 분포하는 우리나라 특산식물인 구상나무군락지대를 1시간쯤 걸어가면 동능 급경사가 나온다. 급경사의 계단 길을 20여분 올라가면 한라산 동능 정상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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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실코스(동쪽 접근 코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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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서남쪽 코스로 가장 짧은 등산로이다. 영실기암 (오백나한)의 빼어난 경관은 영주십경 중 일경이며, 10 월의 단풍은 장관을 이룬다. 1994 년 7 월 이후 정상부근의 자연휴식년제 실시로 현재 해발 1,700 고지인 윗세오름 대피소까지만 등산이 가능하며 거리는 3.7 km, 시간은 편도 1 시간 30 분 걸린다. 하산은 어리목 코스로 가능하며 식수는 노루샘에서 구할 수 있다. 1100 도로에서 영실 진입로 2.5 km 지점에 매표소가 있고 시외버스는 여기까지 운행한다. 매표소에서 등산로 입구까지는 약 2.4 km, 도보로 45 분 정도 소요되는데 도로 폭이 좁고 경사가 심해서 12 인 승 이하의 차량과 1 톤 이하 화물차량만 통행이 가능하다. 오백나한의 절경을 돌아 구상나무 군락 지대를 지나면 봄에 진달래와 산철쭉이 붉게 물들이는 선작지왓이 보인다.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정상이 눈앞에 다가오지만 현재는 이곳까지만 등산이 허용되고 있어 등산객들이 아쉬움을 남긴 채 발길을 돌려야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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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록담
삼각봉
왕관릉
2004.06.26. 오전 8시의 제주항
제주항
진달래? 대피소
제주항에 정박 중인 제주 ~ 부산 여객선(도라지호 다음 )
중국 적화후 중국 난민들이 터고온 배
한천
오하마나호에서 일행들과
팔미도 등대
2004.06.26. 한라산 백록담(전날 비가 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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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물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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